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요나의 아들 시몬아…” 요한복음 21장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는 오역이다 — 왜 우리는 다수사본(공인본문)을 따라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성경의 작은 차이 하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표현이 사실은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중요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복음 21장 15–17절 (개역성경)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구절은 오랫동안 복음성가나 설교에서 그대로 인용되어 왔지만, 정확한 원문에 따르면 "요한"이 아니라 "요나"의 아들이어야 맞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 맞는 이유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개역개정조차도 이렇게 말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여기서 *‘바’*는 아람어로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히브리식 인명입니다. 즉, **‘바요나 시몬’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동일하게 **‘요나의 아들 시몬’**이어야 일관성 있는 성경 번역입니다. 실제로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에서는 모두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nas” “요나의 아들 시몬아…” (요 21:15, 흠정역)
왜 개역성경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로 되어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오역이 아닙니다. **천주교가 채택한 소수사본(Alexandrian Text, 소위 비잔틴이 아닌 본문)**에 따른 오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초기에 **천주교에서 번역된 성경(라틴어 벌게이트 및 알렉산드리아 사본계열)**을 참고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이름 혼동과 본문 왜곡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 성경은 **다수사본(Received Text, 공인본문)**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일관성과 정확성을 유지합니다.
고유명사 문제는 사소한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든 요나든 어차피 발음이 비슷한데 큰 문제가 되겠느냐?" 그러나 유대인 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정체성과 족보, 신뢰의 근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한 이유는 바로 그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곧 정확한 신학과 교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왜 우리는 다수사본 기반의 공인본문 성경을 사용해야 하는가? 개역성경은 천주교 계열의 소수사본에 근거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곳곳에 오역과 혼동이 존재합니다.
그 결과 '요한의 아들 시몬아' 같은 오역이 생기며, 오랫동안 신자들이 복음성가까지 잘못 부르고 믿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KJV)**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다수사본, 즉 **공인본문(Received Text)**에 따라 정확하게 **‘요나의 아들 시몬’**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는 소수사본의 불확실성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보존된 공인본문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곧 바른 성경,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진실한 부르심 앞에, 우리는 바른 성경으로 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