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왜 성경 번역이 교리를 바꾸는가? — 마태복음 19장 17절의 ‘선하심’ 왜곡 문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을 선하심으로 자주 표현합니다. ▶ “내가 내 모든 선하심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출 33:19) ▶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로 인도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2:4)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은 의, 거룩함, 긍휼, 자비, 사랑 등 그분의 성품을 포괄하는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진술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19장 17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킹제임스 성경 (KJV, 흠정역 동일) “Why callest thou me good? there is none good but one, that is, God...”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구절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자신을 “선하다”고 부른 것에 대해 되묻습니다. ▶ "너는 정말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말한 것이냐?" 즉,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 / 공동번역 / 카톨릭 성경 / NIV / ESV: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또는
“Why do you ask me about what is good?”
이렇게 번역이 바뀌면 중요한 신학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나를 왜 선하다 하느냐?’ →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질문
‘왜 선한 일을 묻느냐?’ → 예수님은 단순한 도덕 교사 정도로 축소됨
이것은 단순한 뉘앙스의 차이가 아닙니다. ▶ 전자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교리적 선언이고, ▶ 후자는 예수님을 좋은 스승, 도덕 선생 수준으로 낮추는 이단적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문제의 핵심: 왜 이런 번역 차이가 생겼는가? 그 이유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번역했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현대역본(NIV, ESV, 개역, 공동, 카톨릭성경 등)의 근거: 소수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이 사본들은 천주교의 라틴 벌게이트(Vulgate) 번역의 기초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에클레시아(교회)*보다 종교기관 중심으로 편집됨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의 근거: 다수사본(공인본문) = 안디옥계열, 5,000개 이상의 일치하는 필사본들
초기 교회들이 실제 사용해 온 본문을 보존
왜 이 차이가 심각한가? ‘선한 이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핵심 증언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역본은 이 부분을 교묘히 삭제하거나 바꾸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애매하게 흐려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역본내용 요약 KJV / 흠정역"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외에 선한 이가 없다." →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질문 개역 / 공동 / NIV"왜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사라지고 도덕 교사처럼 보임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 공인본문을 써야 하는가? 이처럼 사본의 차이는 단지 단어 몇 개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교리 전체를 뒤바꾸는 핵심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게 만들고
그분을 단지 착한 선생님, 선한 스승 정도로 낮추며
기독론의 핵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개역성경, NIV, ESV, 공동번역, 천주교 성경은 모두 동일한 천주교 소수사본 계열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결과 동일한 오역, 동일한 교리 왜곡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9:17, KJV)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이 중요한 진리를 왜곡하는 번역을 우리가 따를 수 있겠습니까? 바른 성경, 바른 본문, 바른 교리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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