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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사랑과 기쁨 조회수 : 505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3분 56초
  • 성령의 열매: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사랑과 기쁨 
     
    우리는 지난 세 번에 걸쳐 성령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의 차이를 알아보았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시점부터 하늘나라로 가는 그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행히도 구원 받아서 하늘나라로 가게 될 사람 중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 별 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거듭난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시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인간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이므로 우리 인간이 결코 만들어 내거나 생산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5절을 읽어 보십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이와 같은 원칙을 이해하는 열쇠들 중 하나가 바로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설교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막거나 금지시킬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이 법을 내가 어겼다고 나를 체포하거나 고문할 수는 있어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법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내가 사람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전도지를 나누어 줄 때 나를 체포해서 재판하여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겠지만 그 감옥 안에서 내가 누리는 평안을 법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은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 시행하거나 규제하거나 방해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의 열매는 인간적인 수단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에 의해 평안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온유하지 못한 자에게 온유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명령을 하시는 대신 우리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겨 명령이나 규범이나 규칙이나 규례가 없이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빚어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계명이나 율법에 있어 가장 엄격한 사람들이야말로 함께 지내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는 계명을 엄격히 준수한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우리 모두가 제멋대로 행동해도 좋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약 서신서에 나와 있는 모든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통제에 온전히 내어맡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친구 하나 없는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시편 7편 11절과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좀 더 보완 설명을 하겠습니다. 시편 7편 11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판단하시며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향하여 날마다 분노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날마다 화를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 17절을 보십시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대부분이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유행가를 듣고, 세상의 잡지들을 보면서 이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사랑은 느낌도 감정도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은 다름 아닌 분노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적 반응은 다름아닌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제하시는 분이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간직하고 계시지만 그 분노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을 가지고 분노를 가라앉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라고 하는 느낌 혹은 감정을 그대로 발산하시거나 나타내시는 대신 그 감정을 다스리실 줄 아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따스한 감정을 느끼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악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결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늘 낭만적 느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아내의 행복을 위해 남편의 이익을 내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매우 좋게 느꼈으므로” 혹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고 행복하셨으므로” 성경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기쁨(joy)은 느낌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기쁨은 펄쩍펄쩍 뛰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peace)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묵상하거나 기도문을 암송할 때 찾아오는 차분한 느낌이 아닙니다. 기쁨은 가장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내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보시면 사랑하는 형제가 혹은 가족이 죽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슬퍼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머니나 딸이 혹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절대로 슬퍼하지 말라는 것은 불합리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일어나신 것처럼 주 안에서 잠든 이 사람도 다시 살아날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데리고 오실 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내 슬픈 감정보다 더 큰 것, 즉 평안으로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화평(평화, 평강, 평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면 내 마음이 평강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내 인생의 모든 시련에 대한 나의 감정적 반응을 뛰어넘는 마음의 평안을 주셔서 시련과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고쳐 쓰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니 하나님께서 모래 위에 지어진 어리석은 자의 집에 폭풍을 보내셨으나 바위 위에 지어진 지혜로운 자의 집에는 폭풍을 보내지 않으셨더라.”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기대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번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유지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평안을 잃었어요. 어떻게든 이 일이 해결되서 다시 평안을 되찾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성령께서 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어려운 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평안을 주시고자 하시니까요. 폭풍이 당신의 집을 내리치면 아무리 당신의 집이 바위 위에 지어졌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셔야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성령의 열매로 기록된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보다 더 강력하고 위대한 그 무엇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나의 느낌보다 훨씬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오늘 좀 어떠세요?”라고 질문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즉시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답변합니다. 몸이 안 좋으면 그날은 안 좋은 날이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도 별로 좋은 날은 못 됩니다. 기도한 것이 아직 응답받지 못한 채 있다면 별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을 하거나 짜증이 나거나 실망을 하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느끼는 그대로 답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환란을 기뻐하라(환란 중에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연약한 것을 자랑하라(연약한 가운데서도 자랑스럽게 느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늘 있는 대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누군가가 “오늘 어떠세요?”라고 물을 때 “그저 그래요.”라고 대답합니다. 시원찮은 대답에 대화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왜요? 구원을 잃어 버리셨나요?”
    “아니요, 저는 구원 받았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혹시 성령께서 떠나셨나요?”
    “아니요, 성령께서는 떠나시지 않아요.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버리시기라도 했나요?”
    “그럴 리가요. 절대로 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맥이 없어 보여요?”
    “글쎄요. 그냥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이것저것 어려워서요.”
    “그래도,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있으시잖아요?”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도대체 어째서 이런 대화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축복들과 성령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고결한 성품을 모두 억눌러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원하시며 -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시도록 순종할 때 -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느낌들”과 “감정들”을 뛰어넘어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의 길에서 때론 기뻐하다가도 때론 우울하고 풀이 죽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영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느낌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23절까지 보겠습니다.
    16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17 그것들은 다가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報償)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이 머리로부터 온 몸이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 20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 21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23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자신의 육신을 강제적으로 통제해서 영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들이 이를 달성코자 온갖 기준, 규례, 규칙, 규범 등을 만들어 지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숭배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안 먹고 언제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하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정해 놓고 “의지”를 사용해서 지키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시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들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규범이나 규례는 종교 조직들이 당신의 육체를 통제하여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을 보십시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3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느니라. 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있습니다. 나의 느낌(feeling)이나 감정(emotion)이 아닌 나의 애착(affection)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에 완전히 놓여지게 됩니다. 나는 죽었고 내게 있는 유일한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therefore'(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러니까 1절부터 4절에 근거해서 5절대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therefore)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숭배니라.”
    9절을 보면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거짓말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 우리는 육신을 길들여서 하나님께 경배토록 애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절제하여 바른 행동을 하면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고, 만약 자기 통제에 실패하여 율법의 어떤 조항을 어기면 그때는 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며 뒤로 발뺌을 합니다. 이런 위선을 두고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옳은 행동을 하든 잘못된 행동을 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육신의 활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애착(affection)과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되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새 “음행”에 전혀 생각을 하지 않게 되며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런 생각이 틈탈 여지가 없다 이 말씀입니다.
    분노와 진노와 악한 마음이 왜 느닷없이 튀어 나오느냐구요? 그것은 내가 내 육체를 자꾸 억눌러 꼭꼭 누르다 보니 그 압력이 가중되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스며드는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활동을 죽음에 넘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번 성령의 열매 시리즈의 메시지를 듣고 나서 여러분들이 조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육신을 통제하여 그리스도인처럼 살아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내맡겨 그분께서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하지 않는다면 메시지를 듣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육은 육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육신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어(회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거룩한 산 희생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보아야 한 손밖에 못합니다. 한 손은 여전히 더러운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야고보서 1장 23절, 24절입니다.
    23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으니라. 24 그는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길로 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 말씀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만약 미국 사람들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옷을 더 입고 다니려고 할 텐데(육체를 가리기 위해),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성경 말씀대로 곧바로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거울을 통해 보는 우리 모습은 우리의 자아, 즉 육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예배당에서 자신을 드높이는 짓을 하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육신, 즉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육신이 아닌 영적 영역을 다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거울을 통해 우리는 육신에 불과하고 모든 육체는 풀과 같아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며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것, 즉 성령의 열매이며 이 열매만이 우리를 참으로 만족하게 만들고 더 풍성한 삶으로 이끌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빌립보서 1장과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먼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사랑은 함께 증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를 공부할 때 “열매 맺지 못하는 지식”에 대해 말씀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사랑이 함께 증가하지 않은 채 지식만 증가할 경우, 모든 성경공부와 지식의 획득은 당신의 영적 생활을 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당신은 더 비판적이고 더 교만해져서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자기 의에 가득 찬 고집쟁이 바리새인이 되어 버릴 것이며 결국 죄를 짓는 능력만 키우는 셈이 됩니다. 당신은 성경에서 용서, 은혜, 구원들에 관한 성경구절을 척척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동시에 당신이 구원받기 전보다 10배나 더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구절들도 잘 찾아낼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사랑의 증가가 동반되지 않는 지식의 증가는 당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곧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더욱더 풍성하여” 이 기도 내용은 지식이 증가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에 상응하는 사랑이 증가해서 그 지식을 성령님의 통제하에 둘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도 같은 말씀을 보게 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영적 성장을 위한 열매는 단순히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단순히 진리를 믿고 진리를 전파하는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저에게 해로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믿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보다는 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저나 여러분이나 그러니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성장이 필요한데 이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 사랑으로 증거되는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만약 듣는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이 없다면 육신적 책망에 대한 육신적 반응만이 나올 뿐입니다. 진리를 전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에게 진리를 말해 주려고 애를 썼는데 그는 화를 냈습니다. 그 사람 육신적이더라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말하던 순간 그 사람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었으며 그래서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이 그에게 말하려 했던 유일한 순간이 그를 책망한 경우인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함께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난생 처음으로 말을 걸어본 그 순간이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었을 때여서 당신이 그것을 지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상대방이 당신의 말을 잘 받아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지적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 성령께서 담당하셔야 할 몫이지요.
    이에 대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는 오늘 어떤 분하고 전화 통화를 했었는데 그분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우리 교회가 거리설교, 심방, 전도지 나누어주기 뿐 아니라 그 대상자들에게 정말 관심을 갖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가 모여서 성경공부나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것 외에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보이기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일하시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이지요. 우리는 수년 동안 이를 위해 애써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식이 늘어가는 만큼 사랑도 늘어나기를 요구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정직합니다. 마땅히 정직해야지요. 그는 거짓말하는 것이 잘못인 줄 압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마귀가 떠나가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거짓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끼리는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고 책망도 주고받고 함께 일도 할 수 있습니다.(물론 육신적일 땐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합니다. 어떤 분은 “그거야 나는 남잔데 그게 어디 남자들이 할 말인가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나는 너희를 사랑했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남자가 아니셨단 말입니까? 성경은 분명 남자이신 예수님(the man Jesus)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만일 당신과 함께 복음도 전할 수 있고 함께 기도도 하고 교제도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당신 얼굴을 마주 보고 눈동자를 마주치며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령님보다 제 자아가 저 자신을 더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육신적 상태에서는 제가 당신을 쳐다보며 “형제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무 어색하고 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이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째서 예수님께서 하신 그것을 하는 것이 편치 못하단 말입니까?
    제가 구원받은 지 얼마 후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함께 교회에 왔었는데 그때 우리 청년들은 예배당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 성경공부 팀에 와서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소책자라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제목의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추궁하며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는 그가 소위 사랑 타령만 하는 은사주의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결국 그 사람은 그곳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음날 그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 사람뿐 아니라 젊은 혈기에(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판단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사과해야 할 사람의 명단이 꽤 되는 것 같군요. 저는 그 후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그 소책자에 실려 있는 내용, 즉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지요. 제가 어떻게 배웠는지 아십니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친구 두 사람이 저를 배반했습니다. 제 사역은 망가져 버렸으며 가르칠 주일학교 학생도 없고 설교할 교회도 없이 2년간 예배당에 우두커니 서 있기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의 두뇌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을 제가 젊었을 때 배울 수도 있었는데 제가 겸손치 못하고 지식만 배우고 싶어 하는 바람에 큰 대가를 치루고 나서야 뒤늦게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성경을 배우고 싶지 사랑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고 하는데 잘 보십시오. 사랑은 성경 안에 있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더욱더 풍성하여”(빌 1:9) 지식과 사랑,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균형을 잃게 됩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실례를 하나 들어 들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에서 20절까지 보십시다.
    1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더라. 1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자기들의 그물들을 버려 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여기 보면 베드로는 즉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들 중 이런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四更)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가시니” 28절입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거든 물 위로 주께 오라고 내게 명령하소서, 하니” 여기에 보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가다가 물에 빠졌잖아요.”라고 하지만 어떻든 물 위를 걸어간 건 사실 아닙니까? 여러분과 저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고 엄두도 못낸 일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16장 16절로 가 보십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이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은 다름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계시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런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시로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8절도 보십시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말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하매
    여기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따른 지 3년 반이 지난 후 여전히 믿음이 충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신실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전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완전히 헌신된 모습이 역역(役役)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7절에서 29절까지 보십시오.
    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일어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하시니 29 베드로가 그분께 이르되, 모두가 실족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아니하리이다, 하매
    말씀을 보니 베드로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다 알고 계신 내용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주님 저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저는 놀라운 신앙 고백도 했지요. 그러니 저는 이번에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육신의 갈망과 의지와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얼마 후 베드로는 비통하게 울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주님을 따르는 3년 반 동안 자신이 뭔가 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늘 두각을 나타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보니 정작 제일 중요한 순간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이 판명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왜 울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베드로 생각에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 예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기가 형편없는 인간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절망한 그는 결국 옛날 살던 대로 고기잡이를 하러 가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으로 가 보십시다. 이곳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있는 터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한 그곳에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들이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제자들에게 이를 말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이 말씀 속에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칼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꾸중을 듣고 난 후 주님이 잡혀간 곳으로 가서 불을 쬐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고뇌만이 베드로를 사로잡고 있었지요. 그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감정(두려움)과 죽더라도 주님을 따라야겠다는 자기 의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불을 피워 놓고 베드로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를 전 세계로 보내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내 교회를 너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겠다고도 했다. 너는 교회시대 내내 유명한 인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네 인생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 사랑을 고백했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을 했을 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도 주님은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노라고 간증했을 때도 주님은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가 주님의 눈을 쳐다보며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이제 네가 나누어 줄 무엇인가를 지녔구나. 내가 이제야 너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두 번째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 어린양뿐 아니라 양들도 맡기신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주일학교 교사뿐 아니라 설교자로도 쓰임받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17절을 보니 주님께서 세 번째로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근심하며 답변합니다. 근심(grieved)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서 말했던 바로 감정이요 느낌 아닙니까? 베드로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의심 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웠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시다니... 근심이 될 수밖에요.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부정적 느낌과 감정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마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의심하시든, 저의 순전함을 못 믿으시든,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부정적 느낌과 감정을 뛰어 넘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은 갈라디아서 2장에도 나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정면에 두고 책망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 책망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후일 바울을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베드로후서 3:15)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베드로는 당시 제일 유명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할례자들의 사도였습니다. 공개적으로 책망 받을 때 베드로라고 마음이 안 상했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형제들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비통하게 울던 그날 밤부터 무엇인가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와 자신감으로 가득 찬 베드로, 뜨겁게 헌신하는 베드로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통제하고 있는 베드로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생산해 내시면 그 사랑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훨씬 뛰어넘어 우리의 육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신의 행위를 죽음에 넘기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곳에 우리의 애착(affection)을 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무엇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한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서야 여러분은 그분의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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